[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18장(1)
나는 '그리스도의 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가란 그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야 나는 이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쓰고자 했던 이 책에 붙일 이름을 항상 원했었지만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나 제목, 지위, 서열, 관념 등
어리석은 마음이 먹고 사는 모든 것들에 쉽게 현혹됩니다.
마음은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먹고 살 수 있을 따름인데,
그저 생각, 단어, 믿음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들이 마음이 먹고사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할 때,
마음은 자신을 휘저어대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마음은 계속해서 지껄여 대기만 하는데,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은 멈추게 됩니다.
미숙한 마음은 언제나 문제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신의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창조해낼 뿐이며,
이렇게 해서 원인과 결과라는 끝없는 사슬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자신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스스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인과의 사슬은 끝나게 됩니다.
정치가들, 경제 전문가들, 교조주의자들(dogmatists) 그리고 다른 모든, 무슨 무슨 주의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따르고 있는 지도자들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과
똑같은 것들로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이를 스스로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자기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단어들을, 세상에 있는 모든 책들을 모아 놓는다 할지라도
이 최면 상태를 빠져나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것들은, 자신의 조건을 강화시키고자 여기저기 떠돌며 관념들을 추구하는
조건화된 마음에 양분을 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은 결코 창조적(Creative)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창조성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그대는, 어떻게 해야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는지를
내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렵니다.
그대는 어떤 기술(technique)을 연습함으로써 자신이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잠시 내 말을 들어보겠는가요.
하루에 여덟 시간씩 악기를 연습하면 그대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책을 쓴다 해도, 작곡을 한다 해도, 시를 쓴다 해도, 발언을 한다 해도, 연설을 한다 해도,
그 행위 자체가 창조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대는 완벽한 연설가이며, 유능한 작가이며, 좋은 화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여전히 '나'(the me)가 존재하고 있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넘어서 있는 그것, 홀로 창조적인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나-자아가 아니던가요?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이것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입니다.
이를 위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란 다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갈등이 지속되는 한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이 창조적 행동을 방해하고 있지 않던가요?
마음이 대립되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갈등은 창조성을 몰아냅니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라야 창조적 상태가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창조성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성은 그저 있을 따름이다.
마음이 스스로를 이해하게 될 때,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을,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를,
갈등을 일으키는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때,
비로소 창조성이 그 마음 안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신의 그리스도-영 홀로 창조적이며, 그대는 이것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마음이 전적으로 고요해질 때라야, 마음 자신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라야,
창조성이 들어설 가능성이 열립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조성이란 그저 자기-표현(self-expression)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한 듯 여겨지고, 다른 누군가가 된 듯한 느낌만 주는 자기-표현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공허함과 무지 자체이며,
자아를 계속 키울 뿐이며, 자아는 창조성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창조성은, 자아가 부재할 때, 모든 대립이 사라져 고요해질 때,
순간에서 순간으로 그저 있을 따름입니다.
자아가 스스로 창조적으로(creative) 되려고 추구하는 한, 창조성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끝장이 나야만 창조성은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홀로 창조적이신 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며,
그분께서 몸소 홀로 일하실 때, 거기에 참된 창조성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쓴 이 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바를 사람의 손으로 기록하여
성서에 실려 인쇄되어 있는 말들처럼 정확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그대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말이나 말의 의미 자체로는 결코 창조성을 전할 수 없다는 것과,
자아가 부재할 때라야 창조성이 스스로 일하게 되며,
그때 창조성은 어떤 대립이나 갈등도 없이 광대하고 무한하게 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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