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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29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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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했습니다.

'평화란 갈등을 부정하는 상태가 아니란다.

악을 무턱대고(merely) 부정한다고 해서 네가 고결한(virtuous)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추한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더냐?

 

자신의 현재 모습과 반대되는 것들을 추구하는 동안 너는 결코 평화로워질 수 없단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덕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니다.

네가 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너의 현재 상태가 항상 갈등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부정하는 그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은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덕이란 결코 자신의 현재 상태와 반대되는 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다.

 

전쟁을 부인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기 때문이지.

 

이상주의자들이 이상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야기하지 않더냐?

사실 이상(ideals)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가르고 있단다.

나는 네가 게쉬 림포체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너의 일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좌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우파 성향이 있는 사람이든 간에,

그들은 그저 관념(ideas)을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더냐?

자신의 관념이 다른 이들의 관념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갈등과 전쟁과 증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인류가 서로 화해(reconciliation)하게 되는 것은, 관념이란 무엇인지,

그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고 있는지를 알아보게 될 때라야 가능하단다.

 

우리는 스스로를, 영국인, 미국인, 러시아인, 중국인, 인도인 등

그 밖의 다른 이름들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소속되길 바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안전해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단다.

 

그러나 동일시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분리와 분열과 전쟁을 뜻하는 것이, 이것들 안에서 안전(security)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단다.

 

모든 이상주의자들이 갖는 꿈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을 똑같이 믿게 되는 것이다.

그 사상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갈라놓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믿음이란 분열을 일으키는 인자(factor)이지 통합하는 인자가 아니다.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갈등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갈등은 밖으로 투사될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평화를 얻고자 노력하거나 어떤 조직을 만드는 활동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턱대고 전쟁에 반대하기만 하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은 계속 유지시키고 있다면,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가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키게 된단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는 내적 갈등의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너는 더 이상 전쟁광도, 평화주의자도 아니다. 너는 완전하게 달라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너는 자기 내부에서부터 평화롭기(at peace) 때문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세상과도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저런 단체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이런저런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너에게 필요한 것은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적을 바꾸고 있으며,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에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 보인단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선전에 의해서, 자기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 의해서 계속 유지되어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you) 이상, 국가 또는 민족성을 통해서, 탐욕을 통해서,

과장(aggrandisement)을 통해서 전쟁을 부추기고 있단다.

일단 내적으로 전쟁을 부추기고 나서 외부로도 전쟁을 부추기게 되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임이 확실하며,

언제나 모순에 빠져 있는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고함치는 것에 불과하다.

 

너는 항상 무엇인가가 되길 바라고 있다. - 전쟁 영웅, 백만장자, 고결한 사람, 평화주의자 등

그러한 모든 것들을 말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 안에

이미 갈등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을 때, 평화가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어간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멈추게 된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마음을 멈추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실재가 있게 된다.

창조성 그 자체인 그것이 말이야.

 

너는 더 이상 안전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안전을 구하고 있는 마음은 언제나 두려움 속에 있기 마련이고,

창조적 존재(Creative Being)의 기쁨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안전해질 수 있는 그 근본은 이해에 있는 것이지, 관념을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느낌의 형태는 자기-이해와 신성한 이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이상주의자의 공격적인 자기 독단적 태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마음과 가슴은 반드시 평화로우며 고요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 너는, 갈등이 없는 상태란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전쟁이 다른 전쟁을 만들어 내듯이, 각각의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들어 낸단다.

이러한 갈등들을 끝내고자 한다면, 너는 반드시 자아를 이해해야 한다.

자기-이해가 있을 때라야,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갈등을 벗어난 자기 해방이 있기 때문이다.

 

대량 학살, 기아, 불행, 파괴 등과 같은 이러한 문제들을

문제가 발생한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붙잡고 늘어질 때, 오히려 너는 고통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너는 오로지 탐욕과 악의를 새로 포장하는 데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므로 혼란과 적개심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며,

혼란과 적개심은 네가 그 문제의 뿌리를 다루기 전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뿌리들은 너희 자신 속에 깊이 박혀 있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분명해졌구나. 그렇지 않니?

만약 어떤 개혁가가 자신이 바로 문제라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스스로 변화되지 못했다면,

참된 가치들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공헌한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더욱 심화된 갈등과 불행을 더할 뿐이지.

 

때때로 고통을 겪음으로써 너는 자신의 필멸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자신만이 홀로 스스로의 고통을 영속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방법과 수단에 대해 생각을 적게 할수록 너는 너 자신을 더욱 더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며,

더 빨리 평화가 네 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대립되는 것들의 갈등의 상태가 아니다.

 

이해하고 있는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 누구나 그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해가 없는 자에게는 고통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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