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5장(5)
"자, 숨을 내쉬면서 '아음'을 소리 내라. 그 소리가 머리에서 발끝으로 흘러간다.
그 울림을 느끼면 대생명의 흐름을 의식하면서 그것을 온몸으로 내보내라.
그러면 몸이 타오르는 느낌이 날 것이다. 그 열감(熱疳)이 바탕이 된다. 알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실지로 나의 몸은 불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군요. '느낌'이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여러 번 연습을 한 뒤에 나는 정식으로 시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아침에 승원을 나서 산에 올랐습니다.
종일을 올라 저녁 늦게 설선(雪線)에 이르렀습니다.
해가 지자 기온은 단번에 영하로 내려가서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투모에 숙달해 있는 다추안 대사의 직제자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배운 대로 해나갔습니다.
굉장한 열이 나의 몸에서 나와 둘레의 눈이 녹으면서
작은 시내가 되어 흘러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힘으로 된 것인지 또는 양옆의 선배들의 힘에 의한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참 잘 해냈네. 이 두 사람은 다만 자네를 조금 부추기도록 앉힌 것뿐이야." 하고
다추안 대사는 확인해주었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그러나 투모를 완전히 통달하려면 적어도 몇 년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염원해온 수련이기에 그만큼이라도 배울 수 있었음에 나는 만족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이상을 더욱 연습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얀탄 승원의 연례 제일이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대사의 열통제의 놀라운 시범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추안 대사와 그이의 직제자 둘이 이글거리는 숯불 속에서
백열되어 있는 쇠막대 토막을 집어내어 각각 그것을 입 속에 넣었습니다.
입 속의 물기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그들이 얼마 후에 뱉어낸 것을 보니 쇠막대 토막은 동그랗게 고리처럼 말려있기까지 했습니다.
상처는 물론 덴 흔적 하나도 없었습니다.
손을 가까이 가져갈 수도 없이 백열된 쇠토막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연례 제전에는 다른 승원의 승려들도 많이 오고 또 근방의 마을 주민들이 모두 떼 지어 와서는
여러 가지 의식과 라마승들의 종교무용을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뒤에 다추안 대사는 또 다른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이는 두툼한 강철 조각을 하나 집어 들더니 마치 노끈을 매듭짓듯이
그 강철 토막을 매어 매듭을 지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이는 '비물질화(非物質化)'의 원리로 그렇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대사의 손 안에서 강철토막은 노끈처럼 물렁물렁해지는 것입니다.
매듭이 지어진 그 강철조각을 나는 손에 쥐고 힘껏 잡아당겨 보았습니다.
물론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다추안 대사는 매듭지은 강철조각을 다시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매듭을 풀어 반듯하게 펴버린 것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차원까지 가려면 몇 해의 수련이 있어야 하고
몇 해를 수련한다고 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그저 몇몇밖에 안됩니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내가 내 눈으로 봄으로서 불가능으로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다질 수가 있었습니다.
열의 제어는 추위를 다루는 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통달하는 데는 훨씬 긴 수련이 필요합니다.
열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의식상태가 가장 중요하며,
먼저 깊은 주관적 의식상태에 들어 공포와 감정의 동요를 완전히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제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서양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현실로 그것을 해내는 광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모른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가 엄청난 사람의 무리들을 배불리 먹였고, 물 위를 걸었으며,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자를 낫게 했음을 설하면서도 다음 순간에는 그런 일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대사이고 우리가 아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큰 일을 몇 번씩 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존재했던 힘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로 존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힘은 영원히 편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물질이 확고부동하다는 생각과 자기에게는 힘이 없다는 생각을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대들은 깨닫기만 하면 나보다 더 큰일을 하리라'고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믿음만 있으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씀하신 믿음이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바이블을 읽게 되었는데 마가복음 11장 23절에서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을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집 앞에 언덕이 있어 바다의 경치를 볼 수 없는 것이 불만이던 그녀는
당장 창가로 가서 언덕을 보고 말했습니다. "언덕 너는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언덕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그러면 그렇지. 될게 뭐야!"하고 투덜거렸다는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이른바 신앙에 의한 놀라운 치병사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앙을 매개로 하여 이른바 불치의 병이 낫는 일이 수없이 있습니다.
나의 능력으로 나았다고 하는 기적적 치유만도 수백 건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이 일하시는 것'이라고 한
예수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인 대생명이 병을 앓는 자의 안에도
그리고 고쳐주려는 자의 안에도 한결같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상투적인 생각과 말뿐이어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온갖 관념이나 사상을 초월하고 마음을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체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있는 것은 그저 대 생명에 대한 하나의 사상,
하나의 생각 또는 믿음일 뿐이고 그런 것은 대생명 그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이라는 말은 신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것은 하나님 그이는 아닌 것입니다.
'참'을 뒤덮는 온갖 말, 사상, 관념, 신앙 따위의 헛됨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참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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