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요가 (서문) : 히말라야를 넘어서 12장부터의 글
그리스도 요가(Christ Yoga)란 그리스도 의식을 뜻하며 이것은 다른 모든 요가들 너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자유로움 그 자체이며, 자유가 없다면 그리스도 의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그 자리에는 다만 체계와 지식과 기술을 힘겹게 매고 다니는 자아가 있을 따름입니다.
이 책을 중심으로 우리가 함께 탐구해 나감에 따라, 욕망과 추구는 자신과 반대되는 것들,
자신에 저항하는 대립물을 갖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욕망과 추구는 자아가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자아는 실재(實在, Real)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실재, 즉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요가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하면서 맹목적인 추구만 요구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요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되어감(becoming)"은 환상입니다. 실재는 지금(NOW)인 것입니다.
새로운 그 무엇을, 항상 새로워지는 그 무엇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이제부터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what the mind is made up of)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그 무엇, 즉 실재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 다른 누군가의 말을 반감이나 편견 없이 주의 깊게 들을 때처럼
스스로 이 책을 직접 소리 내어 읽어가며 그 내용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서 마음은, 자신과 대립되는 것들과
자신의 믿음과 자신이 지어낸 것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알게 됩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것들은 자유,
즉 그리스도 요가에 이르는 길을 떠나려 하는 그대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듣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듣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과 믿음과 견해를 파헤치거나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조건을 만족시키거나 듣기 좋은 것들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이야기들과 우리의 믿음과 생각을 기쁘게 하고
강화시키는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참된 이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편견 없이 듣는 것은 기예(art)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지와 굳어버린 믿음과 타고난 지식과 자신의 고유한 특질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방어막을 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기예라 하겠습니다.
우리를 밑바닥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이며,
이는 결론이나 추측이 아니라 참이 아닌 것들을 지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진리(Truth)가 아닙니다.
진리는 마음 너머에 있고,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기 전에
마음은 생각을 지어내는 것을 반드시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은(the truth of the matter) 편협하고 아집으로 가득하며
믿음과 지식이라는 틀로 굳어져 버린 마음에는 결코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지식은 마음을 묶고 눈멀게(bind and blinding) 합니다.
자신만의 결론과 편견과 경험들로 어지러운 마음을 갖고
그리스도 요가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요가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사랑이자 신의 지혜이며,
그리스도 자체로서 자유롭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무엇이지,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이 아닌 것입니다.
관념(idea)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창조성을 방해할 따름입니다.
관념이란 자신을 제한하고 있는 조건들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자아가
투사(projection)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들을 때, 그저 말(word)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이 담고 있는 내적 의미까지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대는 사물의 진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자신이 지어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다툼, 두려움, 사업에 대한 걱정, 식구들끼리의 싸움,
사회적 증오와 좌절 등에 그대가 묶여 있을 때, 이 모든 것들은 그대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찹니다.
그래서 그대는 위안의 수단으로서 소위 진리라 부르는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로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할수록 마음은 둔감해지고, 혼란스러운 상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마음이 자극이나 소위 영감이라 부르는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도를 하거나 주문(mantrims)을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서 회피하고자 하는 한,
마음은 스스로의 생각 과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에 이르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이해(self-knowledge)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회피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방법들은 그리스도 요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근본 원리로부터 그대를 멀리 떼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깊게 듣는 데 있어서, 관념을 쌓거나 결론이나 가설이나
추측을 내리는 행위들은 그대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진리의 창조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그것이 지어내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자기 이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문이자
그리스도 요가에 이르는 입구라는 것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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