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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3장(8)

 

'당신이 가는 곳마다 그런 것을 대중들에게 설교하는군!'

이 사람은 아직도 미망을 꿰뚫어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좀 흥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린포체 대사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처음 린포체 대사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찾아갔을 때의 일을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그를 대사는 강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물가에 꿇어앉게 하더니 느닷없이 그의 머리를 눌러 물속에 잠기게 하고는

몸부림치는 것도 아랑곳없이 한참을 강제로 누르고 있다가 겨우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속에 쳐박혔을 때 가장 원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숨을 쉬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자 대사는, '네가 지금 숨만 쉬었으면 하고 절실히 원한

그만큼 진리를 열망하게 되었을 때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승원 안에 널려 있는 몇백이나 되는 불상들을 돌아보고 린포체 대사의 거처로 돌아왔습니다.

대사에게 내가 느낀대로를 말했더니 모든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티벳의 라마교는 뚜렷이 두 파로 갈라져 있다네.

하나는 붉은 모자를 쓰고 하나는 노란 모자를 쓰지.

그래서 홍모파(紅帽派)와 황모파(黃帽派)라고도 한다네.

 

황모파는 신비(神秘)의 면을 추구하며 내가 공부한 것도 그것이야.

홍모파는 의식(儀式)의 면을 추구하여 형식이나 행사를 앞세우는 파라네.

그들은 황모파처럼 신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

간덴 승원은 확실히 황모파이고 나는 거기서 공부를 했고 또 수년간 가르친 일도 있다네.'

 

'저를 안내해 준 첸 센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높은 성직자나 신학 교수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과 같아서 어려운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으로만 말해준다면 그들도 얼른 그 덧없는 멍에를 벗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네.'

하고 대사는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유럽의 어떤 신학자와 대화를 해보았지만 통하지 않더라고 했더니

그이는, '다시 해 보게나. 이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르지.' 하고 암시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첸 센의 집안은 부유한 계층이야.

그래서 그는 친구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제 방도 가지고 있지.'

 

'그럼 가난한 집안 출신의 라마승들은 어떤가요?'

'아아, 그들은 기숙사의 큰 방에서 함께 기거하지.' '그런데도 첸 센만은 독방을 쓴단 말이지요?'

'그래. 그의 가족이 승원에 많은 돈을 바치고 있는 것이야. 그것이 이 나라의 관습이라네.

자네가 이미 알게 되었듯이 여러 가지로 차별이 정해져 있어.

시간의 경과만이 그것을 바꾸어 나간다네.'

 

티벳에서는 거의 모든 집이 남자 하나씩을 라마승이 되도록 출가시키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라마'라는 말은 '뛰어난 자'라는 뜻이고 엄밀하게는 승원장에게만 해당되는 칭호이지만

지금은 승원 안의 성년에 이르는 모든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있습니다.

 

대개 사내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일단 승원으로 보내지는데

엄격한 시험을 하여 육체와 정신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과한 아이는 본인의 십이궁도(十二宮圖, 占星에 쓰임)를 작성하고 적성을 살려

그 아이에게 맞는 부문을 정하여 소속시킵니다.

 

많은 학예부문이 있어 각 부문마다 한 사람의 장로가 통솔하여

각각의 적성에 맞는 일에 힘쓰게 되는 구성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창 자라나는 출가 소년들은 한 걸음 한 걸음 공부해 나가면서

자신의 종교와 신화에 정통하게 되며 희망에 따라서는 대학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준비 후에 21세가 되면 정식으로 승려로서의 인가를 받고자

승원장에게 신청을 합니다. 그리하여 몇 번의 득도식(得度式)을 거쳐 머리를 깎는데

처음에는 정수리에 한 움큼의 머리를 남겨둡니다.

그리고는 거지옷을 걸치고 사원 큰 방에 모인 승려나 가까운 친지들 앞으로 나가

라마승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선택하였음을 보입니다.

 

그 절차가 끝나면 승원장은 남은 머리를 마저 자르고 출가승으로서의 법명을 주며

그로부터는 법명으로 불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걸쳤던 거지옷을 벗기고 라마승의 법복을 입히고 나면 그로부터 그가 앉을자리가 지정됩니다.

 

만약 그가 밀교 쪽의 길을 택하면 밀교에 정통한 고승에게로 보내져서

형이상학적인 높은 가르침에 관한 여러 학파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승원을 떠나 그가 원하는 지식을 줄 수 있는

스승을 찾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신청을 냅니다.

그런 타당한 신청이 허락되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간의 식량이 담긴 바랑을 메고 승원을 떠납니다.

조금의 식량만을 가지고 험준한 히말라야를 뚫고 나가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바로 이 시련을 거쳐서입니다.

 

 

 

모진 시련 끝에 스승을 찾아내면 즉시 교육이 시작됩니다.

그는 먼저 일체의 미혹과 그때까지의 생활의 그림자를 마음속에 떨쳐버리라는 명령을 받으며

스스로의 마음속을 응시하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관찰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자아가 지어낸 온갖 심상(心象)으로 가득 차 있음을,

그리고 그 심상 그것에는 본래 아무 힘도 없고

다만 자기가 그것에 힘을 주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상념과 반응은 주로 두려운 걱정, 의혹, 무지에서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마치 거지옷을 말끔히 벗어버리듯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참 나'는 마음의 생각이나 이미지나 관념 또는 육체나 환경 같은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여 인간의 사고(思考)의 허망함을 꿰뚫어 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수행에서 가장 긴요한 점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움으로써 그는 그 밖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정도의 주의(注意)와

자기 통제의 집중력을 개발합니다.

그는 일체의 그릇된 생각에서 자기 자신을 해방하고,

나타나 보이는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것 속으로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는 이미 전과 같은 자기의 관념이나 사상, 감정, 반응의 노예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육체의 기능 중,

곧 심장의 고동이나 혈액의 순환 등을 스스로 통제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가를 배우고 알게 됩니다.

 

그의 육체는 그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예민한 기계가 됩니다.

그의 마음은 정밀하고 민첩해져서 어떠한 혼란도 없고

아주 미세한 지령에도 즉각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겨우 '길'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 뒤는 그 자신이 홀로 제 힘으로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 뒤의 '길' 그것을 그에게 쥐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뜰하게 일러주신 대사는 이어서,

'내 아들아, 그대가 여기에 왔을 때가 바로 이 단계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앞길을 이처럼 알뜰히 가르쳐주실 분이 또 있을까요! 나는 이제 알았습니다.

 

대사는 내 어깨에 한 손을 얹고는 다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들아. 그대는 나의 신뢰를 받을만한 그릇이다.

그대에게는 이제까지 높은 지도령 몇 분들이 있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그들에 섞여 그대와 함께 있게 되리라.

그 지도령 가운데는 그대가 이미 대화를 나눈 영도 있다.'

 

'네, 스승님께서도 그것을 모두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 알고 있지. 모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참모습에 대한 진리에 눈이 어두워

허망한 구분과 차별을 지어내었을 뿐이다.'

 

저녁을 마친 다음 우리는 의자에 앉아 린포체 대사가 좋아하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잔잔한 고요 속으로 멘델스존의 부드러운 선율이 곱게 흘러갔습니다.

내게는 마음을 조화시켜 줄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대사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는 자기 자신 속의 모순과 대립이 녹아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러나 아직도 밖의 모순, 대립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뭔가 아직 덜 깨친 것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는 노여움도 아직은 얼마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오래지 않아 깨끗이 가신다는 것을 자신하게 되었으니 마음은 느긋했습니다.

하긴 나의 해탈은, 느낀 기분처럼은 완전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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