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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3장(6)

 

나는 주님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항상 나와 더불어 있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주님이야말로 조종자입니다. 이제 이 힘의 적용을 방해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자각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자각을 거쳐서만 실재는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이 깨달음을,

이 ‘직접 체험에 의한 앎’을 여태껏 놓쳐왔을까요?

깨달음이란 이처럼 단순한 것을.

 

여태까지의 나의 미망과 온갖 신조(信條)에의 얽매임이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온갖 상념, 사상, 신조, 편견, 공포 따위는

한 겨레 한 동기들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알았습니다. 진정 이제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남에게 하는 일은 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이다.'

이 말은 거짓도 엉터리도 아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들이 하는 일은 바로 내게 하는 일이다.'라고 한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남에게 하는 것은 바로 나를 이 땅 위로 보내신 신에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전체 속에 있고 전체는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깨달은 이상 이제 나는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어서의 유일한 힘인 자유와 예지와 사랑을

나는 현실로 나의 안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주님의 치유(治癒)의 힘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 나도 예수 그이처럼 '일어서서 걸어가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뒤로 나는 온 세계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고쳐주었으며,

그 가운데는 얼굴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몇이 있습니다.

내게서는 나이가 사라졌고 나의 나이를 아는 사람들은

나의 다시 젊어진 모습에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놀라운 꿈 이야기 같지만

사실 그것은 이제까지 알려진 어떤 꿈 이야기보다도 엄청난 것입니다.

 

참으로는 어떤 사람이든 모든 인간에게 이 힘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힘의 드러남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들이 단절(斷絶)이 있다고 믿고 있는 그릇된 믿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인간과 신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는 미망이

그 힘을 뒤덮어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재에 있어 '하나'입니다.

어리석음과 미망 속에 있는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입니다.

 

선(善)과 악(惡)은 그저 상대적인 것이요, 다만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것 속에는 어떤 악도 존재할 수 없으며

거룩한 것만이 실재이며 영원이며 보편입니다.

 

악, 지옥, 악마 따위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가 생각의 잘못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악에 사로잡혀 악밖에는 보지 못하게 되어 있는가요.

'마음은 마음이 보는 것을 닮는다.'는 말은 참입니다.

 

주 예수의 가르침은,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지어낸

온갖 형식으로 뒤덮여 가리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신비의 너울로 감싸 사람들을 혼미 속으로 빠트립니다.

 

이제야 알았지만 이 책을 쓰는 일은 때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은 때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말할 때가 온 것입니다.

 

라마승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총가 소리가 나를 명상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벌써 태양은 승원이 서 있는 산 뒤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장엄하고 화려한 광채의 난무, 선홍에서 진한 금적색으로 바뀌면서 빛살은

팔방으로 뻗치고 승원 전체가 마치 거대한 불구덩이 속에 있는 듯

그 찬란한 광채 속에서 태연히 쉬고 있었습니다.

 

나는 승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더듬어 갔습니다.

린포체 대사와 나의 스승이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

뭔가 내가 생생히 빛나는 모습이었던 모양입니다.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오, 자네는 청춘을 되찾았군그래."

 

그렇습니다. 바로 그 말씀대로였습니다.

인류가 몇천 년에 걸쳐 계승해온 온갖 자기 한정이라는 덧없는 짐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제 나는 무애자재인 것입니다.

그 느낌은 이미 말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해탈, 거기서부터 살아가는 힘,

그 법열을 나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고전음악의 가락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음악은 내게 다시없는 안정제였습니다.

 

다음날 나는 승원을 돌아보려고 나섰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지고 개중에는 보석으로 박아놓은 것도 있다는

초상화들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어가 능숙한 첸센이라는 젊은 승려가 나를 안내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즐링에 있는 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라마승이 되려고 티벳으로 돌아왔다는 청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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