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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김, 명상, 마음공부] 히말라야를 넘어서 19장(3)

 

'예.' 나는 말했습니다.

'이제야 기억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은 무엇을 위해 있는지를

제가 반드시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그것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그것이 언제나 새롭기 위해서는, 어제의 기억을 통해서 반응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는 대답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실재 곧 지혜(Wisdom)는 네 안에서, 네 주위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야.'

'너는 자신에게 영적인 동반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네가 영적인 동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저 영적인 동반자에 대한 개념에 지나지 않아.

네가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때, 너는 그 개념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니?

이것이 자유이며, 자유 안에서 실재가 존재하는 것이야. 이 말을 이해하겠니?'

 

'예.' 나는 대답했습니다. '이제 정말로 이해했습니다(I do understand now).'

이 말이 끝나자 그는 그의 법복(robes)을 걷어들고는 가버렸습니다.

홀로 남아서 이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도록 나를 두고 자리를 피해 주신 것입니다.

 

내 마음은 기억의 오래된 상처들을 놓아 버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기며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았었습니다.

내 앞에서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으며 이제 나는 생각의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불완전했던 모든 경험들은 이제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my self)이 바로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기억 스스로의 중요성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나는 기억들에 달라붙지 않고 그것들을 하릴없이(impersonally) 바라보았으며,

그것들을 두려워하거나 분노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라는 것을 이루고 있던 것들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what I was)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순간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

내가, 곧 내 자아가 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보인 반응들은 나를 규정짓고 있는 틀(conditioning)을 보호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 틀은 결코 실재가 될 수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실재에는 반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자아만이 반응을 했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는 내 자아를 이해하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밝혀내는 것(self-revealing)이 곧 자유였습니다.

 

기억, 생각, 과거, 미래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내 자아였으며,

나는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saw)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기억, 생각, 반응들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두려움, 미움, 허영심, 질투를 놓아 버렸으며(lost)

더 이상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기억, 생각, 반응 이러한 모든 것들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으며, 기억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스스로 실재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가 무엇을 뜻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비난받지 않으려거든 비난하지 말라.' 그때 이 모든 조건-기억-생각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었으며,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에 묶여있는 것은 바로 자아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역시 자아를 이해함으로써 오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변혁은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실재가 아무런 제한 없이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재가 일하는 영역은 참으로 거대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순간에서 순간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재로서 그 어떤 제한도 없을 때 그저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렇게 현재 속에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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